[사람과 법 이야기] 누구나 생애 첫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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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법 이야기] 누구나 생애 첫 기억이 있다

비가 그친 어느 초여름 저녁. 나무판자 담벼락에 파스텔 색조로 노랗게 번져나가는 온화한 햇살. 맑게 갠 대기의 청량한 기운은 열병을 앓다가 깨어난 아이의 온몸을 차분하게 감싼다.

기울어가던 해는 황금빛으로 물든 서녘 하늘 가장자리 즈음 활짝 펼쳐진 도화지 한쪽에 온통 따스한 주황빛 물감을 쏟아부었다.

며칠 아프다가 간신히 엄마 손을 잡고 골목길 산책에 나선 아이는 코피를 막아둔 솜 때문에 자꾸 숨이 차올랐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코피는 이제 그친 것 같은데. 한데 또 코피가 나오면 어쩌지. 석양의 햇살에 눈이 부신 아이는 도시 불안해졌다.

아이 엄마는 콧속이 간지럽거든 코피가 멈춘 것이니 재채기를 해보라고 일러준다. 부러 킁킁 하고 내뱉은 콧김에 솜이 툭 빠져서 땅에 떨어진다. 아이는 안도감에 까르르 웃었다. 그때 필자의 나이는 서너 살쯤 됐던 것 같다. 이 장면이 생애 첫 기억으로 지금껏 남았다. 필자는 `법적 판단과 의사 결정, 사실 인정`을 주제로 연구와 강의를 해오고 있다. 이 연구에서 `아동의 기억`도 고민거리가 되는 주요한 꼭지 중 하나다. 스스로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는 일도 자기 연구의 한 과정이겠다.

사건 현장을 체험한 아이들의 기억이 재판에서 결론을 좌우할 중요한 증거가 될 여지가 있다. 순진한 아이들이 이해타산을 따져 계산적으로 거짓 진술을 해 혼선을 줄 여지는 대체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동 진술은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증거 가치 자체를 무시할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아동의 기억을 다룰 때는 언어 지능의 발달, 학습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고려 사항이 있다. 때론 사건관계자 혹은 주변 상황에 따른 암시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그로 인해 기억이 온전하게 보전되지 못한 채 왜곡되거나 기억의 출처에 혼란이 일어나 엉뚱한 기억이 주입될 수도 있다. 특히 아동 진술 증거가 유무죄 판단을 좌우하는 핵심 증거가 되는 때에는 매우 섬세하면서도 과학적인 접근이 왕왕 필요하다.

기실 재판에서 기억의 중요성은 비단 아동 기억 재판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재판에서 다툼이 벌어지는 것은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다. 객관적인 물증이나 서류 없이 과거의 일을 놓고 오로지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재판도 꽤 많다.

그런데 재판 실무 감각상 어른들의 기억 역시 그리 온전치는 못한 것 같다. 이것은 재판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같은 체험을 한 사람들도 저마다 기억은 사소한 뉘앙스에서부터 다를 수 있다. 때론 완전히 상반된 기억을 내놓는 일도 종종 발생하는데, 이것이 분쟁의 불씨로 비화한다.

아동의 기억 증거를 다루는 강의에서 청중에게 생애 최초의 기억을 스스로 되살려보도록 권유하곤 한다. 바쁜 일상에서 자기 회고의 여유는 그다지 없을 터에, 생애 최초 기억을 회상하는 경험은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가 보다.

깊은 상념에 빠진 끝에 얻은 생애 최초의 기억에는 어떤 흐름이 발견되기도 한다. 대체로 안온하고도 편한 기억보다는 불편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더 많은 듯하다. 어린 시절의 곤경 속에서 얻은, 강하고도 아픈 느낌들이 최초의 기억으로 남아 있을 소지가 큰가 보다.

주목할 것은 그 최초의 기억은 대체로 말을 익히고 난 이후의 것이라는 점이다. 언어가 기억에 미치는 영향은 그래서 막중하다. 하지만 다채롭고도 불연속적 감각 세계에서 얻은 온전한 기억들이 우리 언어의 한계 때문에 디테일을 잃고 왜곡될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크다. 생애 최초의 기억 역시 정말 진짜일까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최초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병치레 끝에 저녁 햇살의 기운을 느끼며 처음으로 온전하게 세상 밖으로 나와 엄마 손에 이끌려 우주를 마주하고 선 내 마음속 연약한 아이를 만난다. 그 시절에 대한 신선한 그리움과 그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삶의 힘도 아울러 느낀다. 그 아이를 조용히 안아주면서 또 언젠가는 우주의 원소로 돌아갈 날을 생각한다. 그때까지 이 소중한 기억의 흐름을 진지하게 이어가길 겸허하게 간구하는 주말 하루를 보내고 싶다.

[김상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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