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법 이야기] 생각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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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법 이야기] 생각의 함정

변호사 사무실에 한 고객이 찾아왔다. 젊은 여성이 지난 3년간 직장 상사에게 성적 폭언과 같은 괴롭힘을 지속적으로 당해 왔단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 문제로 고소를 하겠다고 하니, 합의를 보자고 매달린다는 것이다. 제시한 합의금은 500만원. 이 제안을 거부한 의뢰인은 위자료 청구 소송을 하고 싶어 했다.

법원에서 위자료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을지가 궁금한 가운데, 변호사로서는 법원에 제출할 소장에 위자료 액수를 얼마로 정할지가 첫 현안이었다. 독자 여러분도 위자료는 얼마이면 좋을지 아래 글을 더 읽기 전에 잠시 멈추어 생각을 한번 정해 보기를 바란다.

필자는 로스쿨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데, 같은 질문을 설문지 응답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해봤다. 더러 1000만원 전후라는 답을 내놨지만, 2000만~3000만원 수준을 중심으로 한 답변이 대세였다.

그런데 상황 하나를 빼고 더하면 답변 양상이 달라진다. 무작위로 고른 학생 절반에게는 위와 같은 동일한 사례를 묻는 설문지에서 `직장 상사가 500만원을 제시했다`는 부분을 빼고 `직장 내 성적 괴롭힘 사건에 관한 특별법에 의하면 위자료 상한액은 30억원이다`를 추가해 봤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그런 특별법이 없다. 이 설문은 가상인 사례를 놓고 학생이 응답하는 데서 오는 차이를 알아보려는 의도에서 구성한 것이다.

답변 주류는 2억~3억원으로, 앞서 500만원 그룹에 비해 중심값이 무려 10배나 커졌다.

이 결과 앞에서 설문에 응답한 학생들 스스로가 깜짝 놀라게 된다. 미리 그럴 것임을 예상한 필자는 이 학생들에게 가르칠 것이 생겼기에 은근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같은 교실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눈 것이기에 그룹 간 인적 구성이나 성향 차이는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유일하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설문지에서 500만이라는 숫자와 30억이라는 숫자의 차이뿐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달라진 설문 내용을 간단하게 조작한 것만으로도 집단 간 응답 차이가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500만원 그룹에 속한 학생은 이 액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응징을 위해서라도 더 높은 액수로 위자료를 정하고자 했다. 한편 30억원 그룹은 응징은 해야겠지만 최대 상한액 정도로 높은 액수를 책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에 못 미치는 액수를 정한 것이다.

이 우연한 숫자 차이는 응답자 집단이 내리는 의사결정에 매우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500만원 그룹 학생은 더 강력한 응징을 하고자 했지만 생각의 출발이 500만이라는 숫자에서 시작해 얼마나 더 큰 액수를 정할지 고민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500만원이 끌어당기는 힘의 마력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30억원 그룹 역시 그 숫자의 완력을 거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같은 사안임에도 이처럼 생각 차이를 이끌어 내는 것은 우연히 제시된 숫자가 의사결정 기준점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숫자가 판단에 참고가 전혀 될 수 없는 무관한 것임을 판단자가 인식했더라도 무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적 의사결정에 오류를 초래하는 편향(bias) 현상 중 하나로 심리학에서는 여기에 앵커링(anchoring, 정박편파)이라는 명칭을 붙여 다루고 있다.

이러저러한 인지적 편향이 우리네 인간 일상사 판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실수는 위자료를 정하는 법적 판단에까지 개입할 수 있기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같은 현상을 놓고도 의견이 극과 극의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 요즈음 세태다. 그럴 때 들게 된 생각이 정말 내 생각인지 궁금해지는 이유다. 상황 논리와 누군가의 교묘한 조작에 놀아나 함정에 빠진 가운데, 나도 몰래 든 생각이라면 좀 억울하기 때문이다.

[김상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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